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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교에서 광진교에서 / 최승환 에 취한 듯 대관령에서 미끄러지던 봄바람이 생각나던 날, 빈둥거리던 문바람 박차고 무작정 걷던 광진교에는 산책하는 바람이 있었다 철쭉이 은빛 강물처럼 인사한다 바람에 밀려 강 아래 둔치를 지나친다 아쉬운 듯한 마음을 나무가 여운처럼 반긴다 치킨 배달 소년이 잠시 멈칫하는 허공에 주소가 없다 바람처럼 동해에서 주문이라도 한 것일까 강물은 교각에 부딪히고 소리는 자동차에 묻힌다 강변에 매달린 미루나무 이파리가 한쪽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제5 전망대를 쳐다본다 마주침의 쓸쓸함이 여유롭고 나물을 뜯는 손길은 한가한 맛이다 바람은 여전히 물결을 밀고 있다 해발 800m에서 약속한 바람이 팔당 댐을 지나 아이리스 영화를 촬영해도 좋을 8번가로 흐른다 사람이 아름다운 전시장에서 아찔한 강물 .. 더보기
끝나지 않는 편지 끝나지 않는 편지 / 최승환 나는 철 지난 편지입니다 학교가 지난여름처럼 물에 잠겨있습니다 얼굴을 내민 나무 끝에 오래도록 매달려 시간을 숙고합니다 향나무가 연필처럼 문장을 은은하게 쓰다듬고 있을 때 책장에 곰팡이 하나 물끄러미 내려다 봅니다 돌아가도 좋을 고향은 사라지고 지금은 교실도 없어 우체국 교환국 기지국 국가 또는 정부 나는 빨간 우체통에 남겨진 자화상입니다 못다 채운 편지에는 배달되지 않는 저 외로운 문장이 아직은 겨울을 지나고 있습니다 나는 그대의 쓸쓸한 여백입니다 ​ 더보기
꿈꾸는 책상 꿈꾸는 책상 / 최승환 책상 위에 얼굴이 엎드려 있다 책상은 평면이라 얼굴도 평편하다 책상 위에서 얼굴은 따뜻하게 익어간다 문장 찌꺼기도 잠시 쉬어가는 책상 그것은 낡은 곰팡이와 동침할 때보다 더 포근한 꿈을 꾼다 책상은 지금 안전하다 꿈을 담보로 미래를 가불하는 불안도 없다 비어서 담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책상이 가는 곳 흔들리지 않는 그곳은 어디에 있으랴 이불처럼 꿈을 꾸는 그곳은, 책상은 기꺼해야 낡은 찌꺼기나 받아들이고 부끄러운 과거를 벽쯤으로 여기다가 얼굴이 눈을 뜨면 화들짝 덜컹거리는 책상 얼굴은 책상을 베개 삼아 순백을 생각한다 얼굴은 책상처럼 편안하다 누구라도 꿈꾸는 맑고 동그란 얼굴 책상이 시든 날 얼굴은 찌푸린 하늘을 깨울 것이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