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왕: 내와 같은 사람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왕이 될 수 있겠소? 맹자: 물론입니다. 선왕: 무슨 근거로 내가 잘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까?
맹자: 신은 호흘(胡齕)이라는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大 殿)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釁鍾, 완성된 종에 소의 피를 바르는 의식)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 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습니까?
선왕: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인색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왕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 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왕: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齊)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맹자: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以小易大) 하셨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어찌 왕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습 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 있습니까(牛羊何擇焉)?
선왕: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재물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닌 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맹자: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군자가 금수(禽獸)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가 푸줏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 맹자, 양혜왕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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