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사상

윤사 9강 오컴의 유명론 이중진리설

gazisys 2015. 12. 1. 08:40



이중 진리설- 신학과 철학의 분리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포기하고 신학의 진리와 철학의 진리를 구분하였다.

◦자연적 이성으로는 신에 관해서, 또한 신의 존재에 관해서까지도 전적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오컴은 이성과 신앙을 구분하여 감각에 부여된 개개 사물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만이 확실한 인식이며 보편은 단순한 언어에 불과하고, 신이나 영혼 등은 신앙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경험적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명성이나 계시 또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거나 아니면 계시된 진리나 관찰에 의해 검증된 명제로부터의 논리적 연역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확증하거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은총으로 신자에게 성질(habitus)을 주입하신다. 그 수단을 통하여 신앙의 어떤 조항에도 동의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주입된 신앙이다.(fides infusa). 이 주입된 신앙 없이는 신앙의 어떤 행위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유명론 - 보편논쟁에서 실재론의 비판 , 오컴의 면도날(단순성)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까지 많은 것을 가정하면 안 된다. 보다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

◦더 적은 것을 가정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은 것을 가정해서 설명한다면 헛된 일이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

◦새까맣게 그을린 나무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는 나무가 벼락에 맞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어떤 장치를 이용해서 나무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지 않도록 적절히 그을린 다음 자신이 그을렸다는 흔적을 완전히 없앤 것일 수도 있다. 이 상황을 판단할 다른 증거가 없는 경우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해 본다면, 나무가 그을린 것은 벼락에 맞았기 때문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나무가 벼락에 맞아서 그을린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적은 수의 가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가정은 가능한 적어야 하며, 피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유명론 -단독성의 발견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 밖에 없으며, 개별자들 사이의 공통적인 것은 오로지(唯) 이름(名)밖에 없다.

◦보편자가 개별자들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이면서 그것들과 구별된다면 보편자는 개별자들과 분리되어 존재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없다.

◦보편은 실재하지 않으며 유사한 개체들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신이 창조한 것은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 아니라 각 개인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개별자뿐이다. 보편자는 단지 이름일 뿐, 실재하지는 않는다. 존재를 설명할 때 필요한 것 이상을 가정해서는 안 된다.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이름일 따름입니다. 신학적 진리는 계시를 통해 충분히 드러나기 때문에 철학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은 인간의 이성이 아리라 계시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이다. 실재하는 것은 개체뿐이고, 보편은 이름으로만 있다.

◦신이 창조한 것은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 아니라 각 개인이다. 보편은 실재하지 않으며 유사한 개체들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개별자는 한 번에 여러 곳을 점유할 수 없지만 보편자는 동시에 여러곳에 있을 수 있으므로 존이름으로만 존재한다. (개별사과와 보편사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굶주린 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법적으로 확립된 소유 질서를 절도를 통해서도 파괴할 권리가 있다. 

◦보편자가 개체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도 자신의 자식앞에 그 미래의 개체를 이러저러한 사회 경제적 신분으로 식별규정해주는 것으로 미리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죄와 은혜에 대하여 

◦오캄은 인간의 본성 속에 원죄가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아담의 죄책을 인간에게 돌리려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혹은 심판)일 따름이다.

◦“원죄는 갚아야 되는 원의의 상실에 있다. 그러나 죄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자연적 자유는 완전히 손대지 않은 그대로이다. 대죄를 통하여 영혼을 부패시키거나 파멸시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신의 예정

◦하나님은 절대 의지(the Absolute Will)이시고 그의 절대적 권능(potentia absoluta)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구원을 받고 못 받고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달려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어떤 행위가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결정 역시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potentia absoluta)과 하나님의 질서를 통한 권능(potentia ordinata)을 구별한다.이들을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이성보다 의지(意志)가 절대적인 우위권을 확보한다고 주장하는 좋은 방편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구별을 그들의 신학에 총체적으로 적용하였던 것이다.

◦구원의 수단으로 제시된 현재의 질서는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이성까지도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의 분야에 이것을 적용하면 스콜라적 체계 안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했던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다른 속성을 취하신다면 ”하나님은 나귀이다., 하나님은 돌이다.” 라는 전제들도 역시 가능하게 될 것이다. 만일 성자께서 마리아의 아들이 되셨다면 마찬가지로 성부나 성령께서도 그렇게 되실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철학과 과학의 탄생

◦자명하거나 경험에 의해 알려지거나 성경의 권위에 의해 알려진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것도 아무런 이유 없이 확증 되어서는 안 된다.

✍ 아퀴나스는 사유재산을 직접적인 자연권으로 보면서 긍정하지만, 오컴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사유재산도 공동재산도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연권으로 정당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오컴의 이런 제안은 실존하는 개체들이 어떤 재산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이 가진 재산을 정당한 권리인 것처럼 보는 보수적인 입장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사유재산과 개체 사이의 관계는 사실 보편자와 개체 사이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보편자가 개체에 앞서 존재한다는 실재론적 주장은,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이 자연권이고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 보편자가 개체앞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리조 사유재산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태어날 자식앞에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오컴의 입장에 따르면 보편자가 개체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도 자신의 자식앞에 그 미래의 개체를 이러저러한 사회 경제적 신분으로 식별규정해주는 것으로 미리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기초해있기 때문에 오컴은 굶주린 자들이 기존의 사유재산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입장을 피력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굶주린 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법적으로 확립된 소유 질서를 절도를 통해서도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노자편중)

✍ 웃음의 의미 - 옴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에서 비극과 희극을 뚜렷이 갈랐다. “비극은 고상한 사람을 모방하고 희극은 저속한 사람을 모방한다.” 그는 비극이란 관객에게 두려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며 형식을 네 가지로 나눠 자세히 풀이했다. 반면 희극은 간략하게 다루기만 하고 정교한 이론을 남기지 않았다. 물론 그는 희극이 열등한 장르라고 규정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유럽 고전학계에선 이런 추측이 나돌았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을 깊이 분석한 시학 2권도 썼지만 중세에 그 책 필사본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호르헤 신부와 윌리엄은 각각 기존질서를 수호하려는 세력과 그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을 대표한다. 이탈리아 수도원 도서관에서 ‘시학’ 2권을 둘러싸고 연쇄 살인사건이 터진다는 이야기였다. 범인은 수도원의 도서관장 호르헤 신부이었다. 도서관장은 “웃음은 인간의 얼굴을 일그러뜨려 잔나비로 격하시킨다”며 희극을 죄악시해 ‘시학’ 2권을 금서로 지정했다. 책에 독(毒)도 발라놓았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긴 사람은 독살을 피하지 못했다. 기존 교회세력을 대표하는 베네딕트파는 자신들이 해석한 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완전하고 하찮은' 인간의 한 치의 재해석과 문제제기도 허용할 수 없다. 무조건적인 추종만을 강조한다. 식사시간에 베네딕트의 수도사는 "묻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 웃지도 말라"는 기도 아닌 '구호'를 읊조린다. 

◦중세의 신앙과 교회는 단순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구체적으로 실현된 물리적인 조직이며, 또한 이를 바탕으로 전 사회를 통제하는 제도이다. 곧 사회질서와 규범의 생산자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권력을 의미한다. 웃음에 대한 찬반논쟁은 곧 사회전반의 권력투쟁인 셈이다. 중세시대에 웃음은 단지 웃음의 의미만을 가진 건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시된 지배적인 가치와 권위를 흔들어 버릴 정치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웃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교회의 교리에서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며, 이는 곧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인정하지 않는 기존 교회 세력인 베네딕트파가 신앙에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프란시스코파에게 패배함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 권력투쟁이 물리적 강제력을 통하여 나타나지 않고 철학과 논리의 투쟁으로 나타났을 따름이다. 인간의 신앙생활, 곧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 신의 섭리를 해석하고 또 그것을 현실세계에 구현하는 방식과 규범을 독점해온 베네딕트파와 호르헤 신부는 온갖 억지 논리("웃음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웃을 때의 인간의 얼굴은 원숭이를 닮는다."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이 없다" 등)를 동원해서라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접근하는 수도사들을 독살해서라도 신앙과 교회의 영역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배척해야만 그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사소한 '웃음'의 문제에 사생결단할 수밖에 없다. 결국 윌리엄은 중세로부터 근대로 진입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윌리엄 오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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